황용 변호사, 주간조선 기사 법률자문 "천재의사 빙의.. 아이디어 같아도 표절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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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사망한 ‘금손’ 의사가 후배 의사에게 빙의해 환자들을 치료하고 자기 죽음의 비밀을 파헤친다.’
지난 1월 3일 첫 방송된 tvN 드라마 ‘고스트 닥터’의 주된 줄거리다. CJ E&M의 자회사인 스튜디오드래곤과 본팩토리가 제작을 맡았는데, 5~7%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지만, 제작 초기 이 드라마는 표절 의혹에 휩싸였다. 하승현 드라마 작가가 자신의 극본 ‘고스트 닥터’와 유사하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하 작가는 지난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 공모전에 동명의 제목으로 드라마 극본을 제출했는데, 이때 같은 내용으로 저작권을 등록하고 지난해 8월에는 이북(ebook)도 출간했다. 이북 줄거리를 보면 ‘자신이 왜 죽었는지를 알아야 하는 천재의사가 일반인에게 빙의되고, 함께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상처를 치유해나간다’는 내용이다.
하승현 작가는 지난 2018년 7월 이 극본에 투자를 받기 위해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작품을 제출했지만, 같은 해 12월 탈락했다. 하 작가는 지난해 3월 tvN에서 가수 비가 ‘고스트 닥터’라는 작품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곧바로 제작사에 연락해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언론사들에 관련 보도자료도 배포했다. 하 작가는 “2019년 4월부터 디벨로프(아이디어 발전)를 시작했다는데 시기적으로 의심스럽지 않느냐”라며 “천재의사 빙의라는 콘셉트가 흔한 것도 아니고 제목까지 똑같다”라고 주장했다.
‘고스트 닥터’를 둘러싼 논란
그러나 그에게 날아온 것은 120억여원의 손해배상 청구였다. 제작사 본팩토리 측의 법무법인 지평은 하 작가에게 내용증명을 보내 “근거 없는 저작권 침해 주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 작가 측은 언론사에 배포했던 보도자료 중 단정적으로 ‘표절’이라고 했던 문구들을 ‘의혹’이라고 정정하는 메일을 재발송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하 작가는 “애초에 보도자료를 보낸 건 내가 아니라 내 보조작가였고, 젊은 보조작가를 고소한다 하니 정정 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여러 가지로 힘들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워서 추가 대응을 못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시시비비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지만, 두 작품은 천재의사가 누군가의 몸에 빙의한다는 특이한 설정이 같은 데다 제목까지 같아 논란이 됐다. 사실 드라마 업계에서 표절 의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불거져왔다. 공모전 등을 통해 방송국이나 제작사가 손쉽게 수많은 작가의 아이디어를 접할 수 있는 데다가, 극본의 유사성을 판단하는 저작권법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탓이다.
전문가들은 아이디어와 제목이 같다 해서 표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한다. 법무법인 명재의 황용 변호사는 “오늘날 창작되는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과거 아이디어를 완전히 배제해 발견해낸 새로운 아이디어라 보기 어렵다”며 “그래서 저작권법도 아이디어와 표현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아이디어 자체보다는 그 아이디어의 창작적 표현만을 보호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황 변호사는 “제목의 경우도 창작성이 있다고 인정되기 어려워 대부분 사건에서 저작권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렇다 보니 작가들의 아이디어가 보호받기 힘든 상황에서 표절 시비가 빈번히 생겨날 수밖에 없다. 2019년 첫 방영돼 일본에서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도 비슷한 논란에 휩싸였다. 남북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는 특이할 게 없었지만, ‘패러글라이딩 불시착으로 북한 군인을 만나게 됐다’는 설정이 문제였다. 한 작가지망생 A씨는 ‘사랑의 불시착’ 줄거리가 공개된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공모전에 제출했던 자신의 작품과 설정이 같다고 주장했다. A씨가 공개한 작품은 한탄강 부근에서 패러글라이딩하던 발레리나가 비무장지대에 불시착해 북한군 특수부원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A씨는 ‘사랑의 불시착’을 쓴 박지은 작가의 소속사로 항의메일을 보냈지만, 되레 고소만 당했다. 박지은 작가는 ‘푸른 바다의 전설’ ‘별에서 온 그대’ 등을 쓴 스타작가다. 지난해 4월 A씨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피소로 인한 피로감과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고 적었다.
공모전이 아이디어 도용 창구?
특히 ‘작가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공모전이 아이디어 도용의 창구가 되고 있다는 논란은 오랫동안 계속돼왔다. 2004년 KBS 드라마 ‘여름향기’가 한 시나리오 작가의 공모전 작품을 베꼈다는 의혹을 받고 손배소에 시달린 게 시초였다.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공모전은 내부 심사 기준으로 이뤄지고,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공공기관에서 진행하는 공모전도 심사위원이 방송업계 관계자인 경우가 대다수여서 사실 공모전에 제출된 극본에 담긴 아이디어가 외부에 유출되기 쉬운 환경이다. 하승현 작가도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작품을 제출한 이후 아이디어가 새어나간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로 일하다가 그만둔 한 작가는 “사실 아이디어만 갖고 방송국이나 제작사 소속 작가에게 맡기면 가지각색 작품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아이디어다. 공모전에 특이한 아이디어를 내면 100% 뺏길 걸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작가 지망생들은 공모전에 낼 때 아이디어를 뺏길 수 있다는 ‘반포기’ 상태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드라마·영화 극본 작가와 지망생 10만명 이상이 가입한 네이버 카페 ‘기승전결’에는 ‘공모전 출품 시 주의할 점’ 등의 게시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이디어는 흔하지만, 필력으로 승부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라’ ‘인쇄나 수정이 불가능한 파일로 저장해라’ 등등 실질적 조언도 널리 공유되고 있다.
표절 시비가 일었을 때 신인 작가나 작가 지망생이 제작사나 유명 작가를 상대로 소송을 이어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드라마상에서 표절이 인정된 사례는 지난 2002년 ‘사랑이 뭐길래’ 판례가 대표적인데, MBC 드라마 ‘여우와 솜사탕’이 김수현 작가의 ‘사랑이 뭐길래’의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외에는 1993년 KBS 드라마 ‘연인’이 자신의 법정소설 ‘하얀나라 까만나라’를 모방했다고 주장한 변호사가 승소한 사례가 유일하다. 2000년대 이후로는 사실상 ‘스타 작가’ 김수현을 제외하고는 관련 판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법무법인 주원의 정재욱 변호사는 “표절을 심사하는 실질적 유사성이 불확정 개념이라 구체적인 명문 규정이 없어서 해석과 판례에 의존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유사성을 판단할 때 그만큼 판례의 중요도가 높은데, 참고할 만한 선례조차 많지 않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저작권을 지키기가 어려운 만큼, 방송업계에서 먼저 저작권 의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각각의 작품마다 표절 시시비비를 가려봐야 하겠지만, 문제가 되는 사례에 대해서는 확실한 조사와 제재가 있어야 한다”며 “시청률만 높으면 용인하기보다는 저작권위원회 등 관련 단체에서 확실하게 경위 조사를 하고 제재를 가하는 등 규율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